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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환

대대로 여천동에서 살았다. 현재 집으로 이사하여 13년째 살고 있다. 이제는 모두 출가하고 이 넓은 집에 부부만 산다.


정영환씨 사진

자녀

슬하에 아들 하나 딸 둘을 두었다. 다들 큰 말썽 없이 성장했다. 아들은 대구한의대 행정과에 근무, 막내딸은 농협에 근무한다. 다들 착실한 성품이라서 직장에서 잘 근무한다.

과수원 사진

아내

아내는 경산 신씨로 남산면 흥경 출신이다. 고모의 중매로71년 결혼했다. 부부이다 보니 둘 사이에 갈등도 많고 애환도 많았다. 하나하나 곱씹어 돌이켜보면 아내를 참 잘 만났다고 생각된다.

정영환씨 아내 사진

농사

물려받은 땅 9천 평에 과수농사를 지었다. 과수농사는 손이 많이 가므로 매일 해야 할 일이 있다. 때를 놓치면 한해 농사를 망칠 수 있다. 몸 고생은 되어도 일한 만큼 소출이 나와서 경제적으로는 별 어려움 없이 살았다.

정영환씨 사진

사회활동

연일정씨 경산종친회 회장으로 활동한다. 또한 단위농협 이사로 활동 중이다. 이래저래 신경 쓸 일 많지만 나름 활동하는 보람은 있다.

과수원 사진

가장 아픈 이야기

처가 아파서 경산에 있는 병원에 갔다. 의사가 여기서는 안 되니 큰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부랴부랴 대학병원으로 갔다. 다행히 시한을 다투는 병은 아니었다. 한 달 동안 입원해 치료를 받았다. 아내를 간병하며 지난 삶을 돌아보았다. 아내에게 잘해준 일 못해준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마누라 하나 잘 건사하지 못했다는 참회에 눈물 흘리며 많이 반성했다.

집 사진

가장 기쁜 이야기

산소에 갔을 때, 막내딸이 빨간 열매를 따먹었다. 제초제 때문인지 뭔지 모르지만 독극물 중독이 분명했다. 파랗게 넘어가는 모습을 보며 딸을 잃는 줄 알았다. 응급 처방 끝에 겨우 살아났는데, 그때가 가장 기뻤다.

동네 발전

우리 동네는 진짜 골짜기였다. 압량면 33개 동네에서 첫 번째로 꼽히는 오지였다. 큰 길에서 3km나 떨어져 있는 동네였다. 경운기도 겨우 들어올 정도로 길이 좁았다. 그런 오지에 한의대가 들어오고 새 길도 닦으면서 많이 발전했다. 옥답을 내 놓아야 길을 낼 수 있을 때, 동네사람들이 양보하고 희생했다. 그 덕분에 대학이 들어오고 길도 생겼다. 지금은 대로가 생겨 109번 버스가 10분마다 들어오니 교통도 많이 좋아졌다. 인심 좋고 경치 좋던 동네가 교통까지 좋아진 셈이다. 후손을 생각하면 동네가 개발되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딸바보

죽었다 살아난 딸을 시집보낼 때 눈물이 많이 났다. 그런 딸이 벌써 나이가 40이다. 딸 덕분에 건강검진을 자주 하게 된다. 건강을 잃을 뻔 할 때마다 빨리 발견해서 고맙다. 이제는 술 좀 줄이라고 잔소리도 많이 한다. 그래도 귀여운 것을 보니, 나는 딸 바보다.

과일 포장하는 곳 사진

땅이 편입되는 소회

포도밭이 편입되었다. 그 땅에서 농사지어 자식 키우고 공부시켰다. 이제는 보상을 받아서 노동도 덜하고 노후가 편안해지니 좋아진 셈이다. 다만 돈이 생기면 인심이 사나워질까 그게 염려된다. 돈이 뭔가 싶다. 돈은 있다가 없어지는 것인데, 돈 때문에 우애가 나빠지면 안 된다.

딸바보

이제 내 시대는 저물고 너희의 시대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부모의 마음은 한결같다. 손자 잘 키우고 부부 간에 행복하게 잘 지냈으면 좋겠다. 며느리가 늘 와서 농사와 집안일을 거든다. 애들 키우며 할 일 많을 텐데, 일을 거들어주니 고맙기만 하다.

정영환씨와 그의 부인 사진

아내에게

부모가 일찍 돌아가셨는데, 집사람을 잘 만났다. 술을 좋아하다보니 이런저런 애도 많이 먹였다. 사고도 몇 번 쳤다. 그때마다 아내가 뒷일을 잘 수습해주었다. 모자라고 실수투성이인 남편인데도 아내가 다 받아줘서 고맙기만 하다. 늘 묵묵히 가정에서 자녀들을 지켜줘서 더욱 고맙다.

아내를 향한 약속

여보, 내 앞으로 술 줄이고 당신한테 잘 할게. 사이좋게 행복하게 잘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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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4-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