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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웅
성장기
청도 김씨로 6대조 할아버지부터 대대로 내려왔다. 3형제 중 둘째로 여천동에서 태어나 이날까지 살아왔다.
부모가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형과 동생은 공부를 잘했다.
형은 연세대를 나와 도시에 자리를 잡았고 동생은 인하공대를 나와 전공을 살리고 있다. 머리도 좋은 데다 공부도 잘해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간 형과 동생이 부러울 때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가진 재주는 공부가 아니었다. 한 배에서 나와도 서로의 인생은 다르기에 내게 맞는 길을 가기로 하였다.
가업을 이어 받다
큰 재주가 없어서 그런지 농사를 짓게 되었다. 가업 이어받아 농사를 짓다보니 맏이가 할 일을 떠맡게 되었다. 아내 역시 맏며느리 역할을 도맡았다. 집안 제사도 내가 다 지냈다.
아내는 청주 안씨로 경산 사동 사람이다. 택호는 원래 출신지를 붙이는데, 당시 마을에 사동에서 온 분이 많았다. 서쪽에서 왔다 해서 서호댁이라고 불렀다.
부친에게 물려받은 땅에 포도, 복숭아, 대추농사를 지었다. 1970년대에 이 땅은 뽕밭이었다. 양잠이 농촌의 소득원이었기에 누에를 키울 수 있는 뽕나무가대세였다. 양잠산업이 사양길에 접어들면서 수종을 바꾸어야 했다. 그 때부터비탈진 밭을 개간하기 시작했다.
척박한 삶을 개간하다
농기구라고는 삽과 곡괭이 뿐이었다. 땅을 파고 돌을 골라내다보면 허리가 아프고 두 손이 부르텄다. 집에 돌아오면 그대로 나뒹굴어 잠에 빠졌다. 한 평 또한 평, 개간한 땅이 농경지가 되었다. 그렇게 아내와 함께 6500평을 개간했다.곡괭이 자루가 몇 개나 부러졌는지, 곡괭이질을 몇 번 했는지, 삽질은 몇 번이나 했는지, 참으로 고단한 역사(役事)였다.
땀 흘려 개간하고 주변 밭을 사들이다보니, 합해서 8천 평이 되었다. 그 때부터 포도로 작목을 변경했고 소출이 좋아 살림도 일어났다. 허리가 휘도록 피땀흘려 땅을 개간한 대가였다. 땅을 일궈서 자식 공부시키고 밥 먹고 살았다.
일에 치인 인생
서도 일, 앉아도 일, 어딜 가나 일에 치였다. 그만큼 일이 많았다. 땅을 개간하는 것도 일이지만, 개간하고 나면 그 넓은 땅에 작목을 심고 돌보는 것도 일이다. 일이 일을 만들고 그렇게 일한 대가가 오늘이다.
가장 힘들었을 때는 땅을 개간할 때, 가장 보람 있을 때는 땅 개간 다 했을 때
아내를 떠올리면 늘 애처롭다. 나한테 시집와서 고생 참 많았다. 고생을 업으로 타고난 세대니까. 다들 가진 게 없던 시절이니까, 이러한 탓으로 돌리기도그렇다. 농사꾼에게 시집 와서 여태껏 살아준 것도 고마운데, 척박한 삶을 함께 개간했으니 고맙기는 그지없고 이제는 안쓰럽기만 하다.
척박한 삶을 함께 개간한 아내
고생에 고생을 거듭했지만, 아직도 아내는 농사를 많이 짓고 싶어 한다. 이제까지 고생 많았으니까, 이제부터는 인생을 즐기면서 살았으면 하는데, 이런저런 핑계로 잘 안 된다.
서운함이야 있지만
추억은 많고 고생담이 얽힌 땅을 내놓자니 섭섭하다. 그런데 이제는 기력도 예전 같지 않다. 그만큼 농사도 줄여야 된다. 공은 들였지만 이제는 산전 밭에 오르내리기도 힘에 부친다. 이제는 평지에서 농사짓고 싶다. 그러니 한 편으로는 시원하기도 하다.
고향을 지킨 것이 가장 큰 보람
인생을 돌이켜 제일 잘 한 것이 뭐냐고 묻는다면, 고향 지킨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농사는 정직하다. 고생은 해도 열심히 한 만큼 보답하는 게 땅이다.
그래서 농사짓는 사람들은 농사를 놓을 수가 없다.
고향만큼 마음 편한 곳이 없다. 돈이 많이 생겨도 여천동을 떠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여기서 아내와 이웃들과 정겹게 살고 싶다. 우리 동네가 인심이 좋았다. 앞으로도 우애 있게 잘 지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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